유쾌한 노마드의 신나는 '발굴'
최형순(미술평론가)
노마드(유목민)….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동시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는 조건에서만 전쟁을 벌일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1. 들어가며
좋은 작품으로 미술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한다. 얘기해봤자 재미있는 얘기가 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조형의 문제를 말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고개를 젓곤 한다. 그건 어떤 표상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추상적이라고 처음부터 단정된다. 선, 면, 공간, 마티에르, 균형 같은 걸 ‘말’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옹색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런 문제를 늘 고민하는 미술가들조차도 다르지 않다.
조각가 이영섭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꽤나 있는 편이다.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학교에 발령을 받고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때려친’ 일만해도 그렇다. 작가에게는 거의 유일한 생계의 안정장치로 여겨지던 그 교직을…. ‘국전’ 문턱이 어지간히 높던 시절, 응모 자격도 없던 대학생 신분을 감추고 입선한 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그의 표현은 이후 작품에서도 더 이상의 갈증이 없을 만큼 능숙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쉬울 것 없던 그가 요즈음, 우리가 보기에도 좀 ‘웃기는’ 조각을, 그것도 땅 속에서 ‘발굴’해내는 방법으로 유명해진 것도 재미있다.
이런 다양한 얘깃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조형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게다가 그 조형이란 것도 이 작가 초기의 세련된 사실적 표현 같은 것이 아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최근 작품에 주목할 것이다. 그건 그런데, 이 글로 뭘 하려는 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 몇 가지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가 어떻게 유목하고 있는지, 그건 어떤 새로움에 닿아있는지 알리자는 것. 그래서 그런 생성과 가능성을 함께 나누자는 것.
2. 처음―아름다운, 살아있는
국전에 입선했던 작품이다.작품1 뽑아준 사람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는 나중에 이 작품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해부학적’으로 한국인답지 않다는 거였다. 그의 그런 ‘참회’에도 불구하고 미혹한 나는 이 작품에 열광했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남녀였다. 각선미며, 인체의 비례며, 얼굴의 생김이 그야말로 ‘늘씬’하고, ‘세련’되고, ‘예뻤’다. 처음 이 작품으로 알게 된 그의 표현이라는 게 정말이지 그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습관이 된 미의식이란 늘 그랬다. 그야말로 이국적인 신선함 같은 거였다. 특히 가는 목 위에 두드러지게 도톰한 뒤통수로 이어지는 선. 그건 영리하고 귀족적인 청년의 이미지,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그는 그 두상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우리에게 그런 머리는 없다(!)는 거였다.
사실이지 이 조각상은 미화된 인체다. 가늘고 유려한 팔과 다리! 그건 아름답기 위해, 몸을 지탱하거나 부릴 수 있는 힘과 근육을 갖고 있는 인체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그로부터 5여년 후, 지금으로부터는 10년 전의 그에게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 조형력이었음에도. 대신 그는 살아있는 조각을 원하고 있었다. 이런 요구가 사실적인 인체의 등신상 조각으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사람 크기 정도로 만들어진 테라코타를 보자.작품2 불에 구운흙이란 뜻의 테라코타. 테라코타는 구웠지만 도자기 같이 흙의 입자가 완전히 녹아있지 않다. 처음 만들 때 포함되어 있던 수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입자들이 서로 닿는 부분이 살짝 녹아 붙어있어 전체적으로 단단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표면 자체는 흙의 입자들이 그대로 드러나 붉고 푸석푸석한 마티에르를 갖는다. 흙으로 조형된 상태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방법이 테라코타인 셈이다.
그러므로 금속성의 조각품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테라코타는 그다지 완결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테라코타로 유명한 작품은 흔치 않은데, 권진규의 <비구니> 같은 몇몇 초상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권진규의 작품이 그렇듯, 테라코타 작품은 소박하고 작은 크기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불에 구울 수 있는 가마의 크기, 가마가 크더라도 작품을 가마 안으로 넣을 수 있는 입구의 크기 때문에 작품 규모가 제한을 받는다. 무거운 흙으로 뼈대도 없이 텅 빈 채 무너지지 않도록 크게 세워 만드는 일만해도 문제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사람 크기의 인물을 진흙으로 만들어 말린대도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장정 너댓은 있어야 들 수 있다. 그걸 편한 상태로 들기도 어려운데 좁은 가마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뒤집고 하기가 생각대로 간단한 일일까? 그래서 테라코타로 등신대 크기의 인물을 만든다는 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앉아있는 인물이 실제 사람의 크기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굉장한’ 사실이 된다. 그뿐 아니다. 모든 게 실험이었다. 그런 테라코타 작품을 굽는 온도와 시간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었다. 작품이 터져버릴 위험은 상존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조건에서 나온 것이어서 이 작품의 완성도는 더욱 놀랍다.
이 작품에서 아름다움만 본다고 하자. 잘 만들기로 치자면 <여로>에 못지않다. 잘생긴 얼굴, 포즈의 자연스러움, 해부학적인 사실성이 어우러진 신체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능숙한 표현력은 어떤 소재라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이와 같이 남루하고 고풍스런 복장이든, 프랑스 신고전주의 조각가 우동의 <볼테르 상>처럼 가득한 주름에다 해골 같은 얼굴이든 말이다. 그러나 <여로>작품1와 이 작품 <고요>작품2가 대비되는 분명한 지점은 있다. 도회적 세련됨에 대비되는 투박한 자연스러움, 유려한 선을 위한 왜곡에 대비되는 정확한 재현, 연출된 포즈에 대비되는 중력에 그대로 몸을 맡긴 지극히 자연스러운 포즈. 다시 말하면, 아름답게 만들고 그게 성공적이었던 <여로>에 비해, 리얼함으로 인해 그 결과가 아름다운 이 작품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테라코타로 서구적 조형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있다. 우리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이런 시대가 좀 더 오래 지속되어도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의 한 시대가 충분히 각인될 만큼의 분량이었다면 그의 리얼한 표현력은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가 작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이런 테라코타 작품으로 작품전을 열면서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장엄한 테라코타의 리얼리즘은 그대로 그의 레테르가 되지는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굉장한’ 테라코타에는 비장감이 없지 않았다. 머리를 파묻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들면서 주위를 살필 아량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우리가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그건 과시였다’고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치밀하고 리얼한 테라코타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크기에 대한 집착이 남긴 했지만, 어쨌든 표현은 나이브해졌다.작품3 그렇게 1997년 두 번째 작품전에서 표현의 리얼함은 해체되고 만다. 대신 두툼한 흙덩어리에 눈, 코, 입이든 뭐든 아주 쉬워 보이는 형태가 자리 잡게 된다. 그 테라코타들은 우리의 민중적인 조각들을 닮아 있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거나 감탄하게 하려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편안하고 재미있게 표현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그는 좀 더 쉽고 편안한 예술을 위해 고행자처럼 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유서 깊지만, 터만 남아있는 신라의 고찰 고달사 옆으로. 우리가 주목하려는 작품들은 거기서 태어났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 쯤의 일이다.
3. 발굴―더듬거리게 하기
이제 이영섭의 작업 방법은 꽤나 알려졌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발굴’의 작가라고 부른다. 나도 동의한다. 흙 속에 묻혀있던 유물을 캐내는 발굴. 작가는 그렇게 작품을 흙 속에서 캐낸다. 역사가나 인류학자들은 유물을 찾아내 캐지만, 작가란 원래 묻힐 것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다. 우린 그렇게 묻힌 것이 수세기 후 역사가나 미술사가들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발굴될 때, 그걸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다. 근데 발굴이란 그런 것이기만 한 걸까? 타임캡슐도 아닌데 몇 백 년을 기다릴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가는 아주 나중에 발굴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작가와 발굴자 모두가 되기로 한다. 그런 역사와 시간을 넘나드는 방식, 그게 이 작가의 ‘발굴’이다.
발굴은 물론 고달사지 옆의 산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발견’된 방법이다. 그 때 그의 작업장 옆에서는 고달사의 터가 발굴되고 있었다. 흙 속에 묻힌 천년의 침묵이 되살아나는 것이 작가에게는 꽤나 의미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몰라도, 과거의 복원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조각가에게 그건 새로움과 놀라움으로만 비쳐졌다. 기억하는 ‘기계’로서가 아니라 경이에 찬 ‘발견자’로서 그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작가에게 발굴은 새로움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그의 방법, ‘발굴’로 완성된 작품 <휴식>을 보자.작품4 만져질 듯 ‘촉감적’인 질감, 숙련의 ‘홈’을 파거나 세련됨을 애쓰는 조작이 없는 편안한 형상이다. 완성도 높은 환조 조각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듯한 부조로 만들어진 완만한 능선의 풍경 같은 돌덩이. 그건 길거리에 방치된 돌덩어리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수천 년 이 땅에서 이 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흘러온 화강석의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듯 매끄러움이 없진 않지만, 깔끔하게 깎인 표면도 아닌 채 자연스러움도 거의 그대로 살아있다. 더구나 보일 듯 말듯 겨우 음각되어 어렴풋이 드러나는 선의 흔적들도 보인다.
이런 작품의 ‘형상’은 사실, 묻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니까 거꾸로 된 구덩이의 모양이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 작업 절차는 이렇다. 우선 단단한 땅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돌을 팔수는 없는 노릇. 마사토는 푸석푸석해서 쉽게 팔 수 있으며, 파놓은 모양이 무너지지 않는 땅이다. 그런 땅, 마사토가 우선 필요하다. 거기에 형상이 될 구덩이를 거꾸로 파낸다. 소조 작품을 떠낸다고 치면, 거꾸로 된 석고캐스트를 땅 속에 바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형상을 만드는 것은 그것으로 일단 완성이다. 그 안에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넣어 굳히고 주변 마사토를 헐어 파내는 것이다.
자 이렇게 형상을 만드는 것이 우선 거대한 테라코타의 저돌성에 이은 또 하나의 이상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손쉽게 흙을 붙여 형상을 만들지 않고 거꾸로 조각을 하는 방법이라니…. 조각을 더듬거리게 하는 방식! 게다가 기가 찰 일은 또 있다. ‘조각’을 포함하는 ‘조소’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조각과 소조 모두를 뜻하기 위해 각각의 첫 글자로 조합된 말인지는 대개 다 알고 있다. 조각은 깎는 작업이라는 카빙(carving), 소조는 점토 같은 물질로 붙여 만드는 모델링(modeling)에 상응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 작품은 조소의 분류에서 어디에 속할까? 도대체가 ‘포획’이 되지 않는 방식이다. 깎아내서 형상을 만들었으니 소조가 아니요, 형상을 떠내는 방식이니까 조각도 아니다. 쉬운 방법을 마다한 무모함에다 쉽게 이해의 채에 걸리지 않는 작품의 존재 방식. 그래서 그의 작품이 미술관에서 분류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 별도의 분류항목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소조도 조각도 아닌, 바로 발굴이라는.
이렇듯 그는 ‘뻔뻔하게도’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엉뚱한 형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미술이라는 제도는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동․서양화가 갈리어 한지와 유화 재료 사용을 서로 꺼리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구상과 추상으로 공모전이 나뉘어 있어 출품에 앞서 작가는 누구나 자기 작품이 먼저 구상인가 추상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게 어디 간단한 문젠가? 추상과 구상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도란 대개 그런 역기능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엄격한 적용을 강조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유목’을 허용하지 않는 ‘정착민의 홈파기’를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 작가의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 그렇다면 그건 뻔뻔함이 아니라 당당함이 아닐까?
이런 더듬거리게 하기, 다수성을 소수화하는 작업은 왜 필요할까? 다수적인 것은 언제나 권력과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자나 아나운서가 언제나 표준어로 말해야 하듯, 방언은 가르쳐지지도 않듯 말이다. 그렇다고 방언 같은 것이 모두 소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수적인 것을 변이시켜 새로운 종류의 활동을 만드는 것, 창조와 생성에 적극적인 한에서 그것을 소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을 상대화하거나 약화하면서 충돌하지만, 그와 나란히 ‘정당한’ 지위를 갖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소수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성은 항상 권력에 의해 정의되며, 소수성은 변이의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게 왜 필요한 지 미술도 여러 차례 증언한 바 있다. 열네 살에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만큼이나 그릴 수 있었다고 자부했고, 그렇게 평가되던 피카소. 그 때 그렸던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초기의 작품들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선>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국전 같은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한 16세 때, 그의 아카데믹한 고전적 소묘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라파엘로 같은 피카소가 되는 데는 요람에 있던 때를 포함해도 14년이면 이미 족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그림, 특히 20대 중반 그리기 시작한 이상한 그림들에 와서야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여기서 피카소 자신의 회고는 ‘결정적으로’ 빛난다. 창조적인 미술을 위해 그 전까지의 고전적 방식을 벗어버리는 데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바쳐야 했다는.
그러니까 다시 확실하게 말해 두기로 하자. 피카소가 ‘버리기’ 위해서, 그것을 얻는데 드는 것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면, 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다! 이영섭이 서구적인 조각 방식을 버리기까지의 과정도 피카소에 못지않았다. 테라코타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었다. 아주 느슨하게 일부러 빗나가는 선을 긋는 방식으로는 결코 원하는 선을 얻을 수 없었다. 그건 의욕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식이다. 그것으로 창조적 발산에 이르기 어렵다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때 ‘발굴’의 거꾸로 파내기는 그로 하여금 다른 신체가 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었다. 거기에서 바로 서구의 조형방법을 ‘더듬거리게’ 하고, 주류의 포획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로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탈주의 진정한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부정의 방식이 아니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무한한 긍정. 불필요한 긴 호흡을 잘라버리고 위압적인 무게를 해체하는 것. 발굴과 ‘더듬거리기’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4. 진정한 ‘되기’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영섭의 더듬거리게 하기는 다수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인–되기에 이르게 한다. <휴식>의 인물들에서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마애불을 닮았다? 그렇다. 암벽 위에 드러난 상이니까. 게다가 우리의 마애불이 무슨 고급한 국가미술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 작가가 아무리 불교적 사유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그의 형상들이 딱히 불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고급한 불상이 아니라 민중적인 나한상의 자연스러움이나 친근함에 가깝다.
들뢰즈/가타리를 다시 참조하자. 그들이 말하는 ‘되기(devenir)’에는 어떤 예가 있는가? 남성보다 더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진정한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 백인보다 더 백인처럼 살려는 마이클 잭슨과 같은 흑인들도 진정한 흑인–되기가 필요하다. 소(小)중화사상으로 중국인보다 더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청대의 조선을 보면서 우리는 왜 당시 조선인에게 조선인–되기가 요청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되기’가 왜 요구되는지를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되기라고 해서 정체성을 찾는 ‘치열한 의식’ 같은 것으로 해석하진 말자. 이제 이 작가에게 그런 진지함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불온할 만큼 자유롭고, 차라리 강철 같은 명랑함을 발산하는 그의 삶을 잠시라도 엿본 적이 있다면, 그런 작품성을 해석해 내기란 불가능할 터. 물론 그걸 참조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에서 경직된 이미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휴식>의 편안함에서 어찌 의식적 표현 같은 부자유스러움을 떠올릴 수 있을까? 가식 없는 표현은 그 자체가 삶이고 놀이다. 그것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마침내는 드러내는 표현이다. 찾아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우리는 그걸, 한국인–되기의 진정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한국인–되기는 아이–되기가 있어 좀 더 강력한 추동력을 얻는다. 어린아이 그림과 같은 선을 쓴 뒤뷔페의 작품을 생각해 보라.작품5 뒤뷔페의 부조화 없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색들, 두터운 물감에 어우러져 어색한 조절 없이 자유로운 터치와 선, 단색조의 미니멀한 아름다움은 내게 오히려 세련됨의 극치처럼 보이곤 했었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형상이니까 어눌함과 모자람을 넘겨짚지만, 아이–되기의 진정성은 어른에 비해 상대적인 열등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되기가 발산하는 수많은 새로운 감응(affect)의 생성은 어느 예술의 고상함에도 모자라지 않는다. 코드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넘쳐서 드러나는 것이 어찌 어설프거나 미숙할 수 있을까? <휴식>의 선은 그런 아이–되기를 통해 한국인–되기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한국적 형상이란 또한 ‘추상적 선’의 특징을 갖는다. 이 추상은 보링거가 주로 다루었듯, 개념화의 추상이 아니다. 변형이요 탈형식화를 말한다. 더구나 구상과 반대어로서의 추상을 뜻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온도의 높음과 낮음, 즉 40℃는 20℃의 반대가 아니듯이 말이다. 다만, 추상적 선이 아카데믹한 모방적 선에 우선한다고 들뢰즈/가타리가 말했던 것은 타당한 주장이다. 태어날 때부터 유기적인 구상적(모방적) 선을 긋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술의지’에 관한 한 적절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교육받은 서구인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모두에게, 그로부터 주입 받은 철저한 우리 심성의 소외는 추상충동을 억압하는 것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이 작가 초기의 작품에 그런 유형이 드러났음은 이미 확인한 바와 같다. 생명의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아름다움, 그런 ‘침묵’이 그에게 어울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테라코타 시기 말기에 드러나기 시작한 추상적인 선은, 발굴의 방법에서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시작한다. 거꾸로 파내면서 유기적인 모방의 선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창조적 생성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인 의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을 창조의 과정 중에 담을 가능성. 그러므로 추상적 선은 여기서 ‘되기의 구도’ 속에 내재된 순수 잠재성 그 자체인 것이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오해의 소지가 아주 없지는 않다. 예컨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캐내는 것으로, 동시대 조각의 요구를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그렇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핵심적 미의식, 환원적이고 회귀적인 원형상을 찾는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이 작가의 선정적인 방식과 생기발랄한 추상적 선들에 대해서조차 말이다. 그것이 과거의 이미지와 닮은 점이 있다고 해서 의식적인 환원이라고 지적한다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그 형상마저도 피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그의 의식적 추구였다는 해석은 ‘되기’를 설명할 수 없다. 친숙함이나 과거 이미지와 유사함을 들어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란 해석은 거꾸로 된 것이다. 그의 친숙한 형상들이 사실은 끊임없는 생성에 의한 ‘주름’임을 안다면, 그건 오히려 새로운 ‘되기’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5. 생성, 변이
그의 조각이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언어적 수사가 아니다. 작업 속에서 그의 형상은 스스로 만들어지고 변형된다. 물론 작가의 화룡점정 과정은 있다. 그렇지만 작업 과정에서 작품 스스로의 생성과 변이의 여지도 작가라면 누구나 열어둘 수 있어야 한다. 내용과 형식의 감응이나 재료나 방법의 힘이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분수의 도시 로마의 그 많은 분수 조각들 중에서 바로크의 최고 대가 베르니니의 작품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조수들 손을 거의 다 빌리고 그가 완성을 결정해도 베르니니 작품임에 틀림없는 것이니까. 못 믿겠다고? 그럼 한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전혀 빌리지 않고 완성할 수는 있다는 것인가? 그게 더 어렵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었던 베록키오가 세례 받는 예수의 그림 중에 천사 하나를 그 비범한 제자에게 그리게 했다가 자기 그림과 비교되어 그림 그리기를 그만 뒀다는 얘기도 남의 손을 빌린 흔한 예 중 하나다. 브론즈 조각이라 할 때도 주물을 작가가 직접 작업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주물 공장이 대신해 준다. 단 하나의 분수를 위한 조각을 하려 한대도 혼자로는 그런 대작을 만드는데 얼마만한 세월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완성한다 해도 많은 스스로의 생성 과정이 있다는 걸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이영섭의 조각에는 그런 생성 과정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작품에 한층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다시 <휴식>작품4의 작업 과정을 보기로 하자. 모래 섞인 시멘트가 마사토 속에서 굳을 때 마사토의 표면이 콘크리트에 달라붙게 된다. 따라서 작가가 의도한 거꾸로 된 조각의 형상이 그대로 찍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달라붙은 마사토 때문에 작품은 마치 화강석 조각품처럼 보이게 된다. 사실은 콘크리트 덩어리인 것이, 마사토 껍질을 쓰고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틀로부터 형상을 떠내는 작업이라면, 틀은 형상만 남기고 작품에 남아서는 안 된다. 합성수지 작품의 틀인 석고나 브론즈의 틀인 주형은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철저히 깎여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과 같은 발굴에서는 콘크리트가 마사토의 틀을 덮어씀으로써 스스로 새로워지게 된다. 형식과 재질에서 비롯된 생성과 변이의 힘은 그렇게 작동한다.
그렇게 생성, 변이하는 조각이지만, 작가는 깎아내고, 갈고, 벗겨낸다. 통제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위해 거꾸로 파낸 형상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에서 조각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또한 거의 없는 셈이다. 이걸 작가의 세심한 주의력이나 조절로 파악함으로써 지금까지 강조한 순수잠재성의 강조를 희석시켜서는 곤란하다. 그가 갈고 닦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방향의 접속에 대해 열려있는, 그래서 어떤 양태도 될 수 있는 구도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그의 작품이므로, 인위적인 거북함 같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생성이란 면에서, 조각적 수단 자체의 추상화야말로, 생성과 변이의 극한처럼 보인다. 조각이란, 물질로 부피와 공간을 다루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왔다. 다시 생각해 보자. 조각품에 대해 말하면서 대체 왜 선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윤곽선이라면 선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도 아닌 화면에 쓰이는 선을 말이다. 조각은 만드는 거지 선으로 그리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는 형상을 ‘만든’다기보다 ‘그리’고 있는 편이다. 그리하여 끝까지 조각가로 남아 조각적 수단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경건주의자들을 허탈하게 한다. 그걸 조각적 수단의 추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추상 작업의 공간에 모방충동이 끼어들기는 어렵다. 변형과 탈형식화의 추상이라면, 논리적으로 거기엔 오직 생성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만드는 것마다 새로운 것일 터이므로. 그런데 이와 같은 조각의 경계에 있는 작업에 대해 한편에서는 ‘딴지’를 걸던 이들도 있었다. 조각이 조각답지 않다면, 그게 어떻게 조각이냐고 묻던 모더니스트들. 그들은 한 때 미술을 좌지우지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었다. 그들이 아직도 묻는다면 작가는 웃을 것이다. 그럼 이게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아마도 그런 반문과 함께. 그는 예술로 ‘조각이라는 것’의 문턱을 넘고 있는 것이다.
6. 맺으며–문턱을 넘어
하나가 아닌 여럿의 가능성. 그게 바로 힘이다. <휴식>은 그런 유목의 가능성이다. 유목은 유랑이 아니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그건 무수한 흐름이 중첩되는 유연성이다. 경계를 넘어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거기에 발견의 즐거움이 있고, 생성의 의미가 있다.
<휴식>엔 다섯 사람이 나온다. 이들은 서로 ‘관계’로 얽혀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일에 무관한 듯하다. 미니멀에서 강조된 바 있는 ‘비상관적(non-relational)’인 배치? 그렇다면 그 자체론 담박한 세련됨이 아닐지. 아닌 게 아니라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형상과 굴곡은 마치 미니멀한 모노크롬적 화면과 같은 느낌이다. 얕은 굴곡 같은 전체 능선은 반원을 이루며 편안하게 전체 화면이 된다. 어느 게 사람이고 어느 게 배경인지 명료하지 않은 채 전체가 부드럽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어느 부분만 따로 보아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미니멀한 세련됨일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음에는 수많은 이미지로 변해갈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려있게 된다. 흰색이 어떤 색도 없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색을 다 반사하여, 즉 모든 색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희게 보이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미니멀은 표현이 절제되었거나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다. 찾으려면 표현된 것이 왜 없겠는가? 그렇게 간단한 선과 굴곡에서도 포즈는 얼마든지 드러난다. 행동이 아닌 입 꼬리를 올리는 방식의 아르카익한 미소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아도, 그 안의 행위가 잔잔한 웃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 인물들의 포즈만 보더라도 그 내용은 넘치게 많다. 가령,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 어머니에게 칭얼대듯 한 손을 얹어 어깨를 당기는 아이(어머니는 균형을 위해 앞으로 숙인 듯하다), 꽃을 바치려고 살짝 부끄러움을 묻힌 여인, 의자에 기대어 두 다리를 드러냈으면서도 다리를 꼰 듯이 보이는 편히 선 인물, 그들의 포즈를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리스 조각의 캐논으로 불렸던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자>가 보여주는 완벽한 인체 비례, 해부학적 근육의 움직임, 느슨함과 긴장으로 좌우가 대조되며 역 S자형으로 자세를 잡게 한 치밀함 따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도 다 드러나는 동세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 때 그의 미니멀은 힘이다. 모던한 제거주의의 극한, 텅 빈 캔버스와 같은 미니멀이 아니다. 표현수단의 강밀함은 그렇게 모두 묘사하지 않고도 부족함이 없을 때 더욱 강한 법이다. 마치 도인이나 무예 고수들의 움직임에 부산함이 없듯이.
그렇다. 강밀도의 지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문턱을 넘기 위해서. 베르그송이 엘레아학파의 착각이라고 불렀듯, 거북의 뒤에서 아킬레스를 출발시킨 제논이 공간을 절단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거북을 따라잡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공간 분석 차원을 넘어서서 내달리게 하는 것. 언제든 유쾌한 탈주를 감행할 수 있는 것. 어떤 것이든 탈영토화할 수 있는 것. 그 감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작가에게 진정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 작가의 유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담을 수 있는 힘, 넘을 수 있는 힘, 버릴 수 있는 힘이다.(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