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서 미술비평

김병수(미술평론가)

 

 

“언어가 방향을 바꾸는 곳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1 – 1. 미술사학과 미학 그리고 미술비평

 

거의 읽히지 않는 미술비평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구나 구체적인 인용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평문이 생각나는 대로 쓴 소박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미술비평은 그 동안 축적된 미술사학과 미학, 그리고 ‘문화들’의 업적들 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비평이라는 것이 바로 미술사가 끝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술평론가 이일은 1992년 『공간』에 발표한 「나의 미술비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방법론이 멈춘 곳에서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 다른 미술사학이 모색되는 것이다. 미술비평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말론과 위기론은 일상성을 획득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관례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근대미술(modern art)과는 달리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당대성(當代性) 혹은 동시대성(contemporaneity)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작동하고 있다. 역사의 종말에서 전 지구적 문화현상을 감당하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유로-아메리칸 전통에서 비롯한 예술이 글로벌해지는 양상이다. 그 프로젝트는 모더니티와는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고유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는 각별한 주의와 의식이 요청된다. 이른바 포스트콜로니얼 현대미술이다. 이와 함께 미술비평은 이상하리만치 (미술)작업과 전시기획 속으로 융합되는 양상을 띠어왔다.

글쓰기로서 미술비평 vs. 미술비평으로서 전시기획! 한국 근대기 전통적인 방식의 미술비평은 이 양자가 뚜렷이 분리되지는 않았다. 실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론’은 이 모든 것을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양상은 달라졌다. 실기도 작업으로 바뀌었고 그 속에는 작품 제작만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이미 비판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심지어는 스스로 새로운 계열을 형성하기도 한다. 미술의 기획이다. 일련의 보고서도 작성된다. 도대체 이제 비평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 지경에 이르니 미술비평의 만연은 전문적인 비평의 종말 혹은 기껏해야 비평의 위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자체 평가에서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적인 태도에서 미술비평이 엉망진창의 상태라고 진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기는 회복의 대안이라도 모색할 수 있는데 쓰레기는 이미 그 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이 정도로 여전히 작동하는 미술비평의 종말론은 유효한가?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콜로니얼 미술비평은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토착적 글쓰기는 그 쌍생아인가?

 

 

1 – 2. 유동하는 모더니티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더니티의 유로-아메리칸 스타일이 근대미술이라면 글로벌한 방식이 현대미술일까? 말처럼 그 둘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는 미술의 언어가 작업 혹은 실천과  이론의 이원론으로 나누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각 문화별로 구분되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굳이 이제 와서 현대미술에 대하여 토착적인 글쓰기를 하자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미술에 대한 우리의 언어는 이중적으로 외래적이다. ‘미술’ 그 자체의 언어가 그렇고 그것에 대한 언어가 또한 그렇다. 물론 전통 혹은 전승에 의한 몇 사례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대개 자생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일방적인 자괴감을 강요하며 그 반대편에서 허무맹랑한 자부심을 견강부회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다양한 근대성들을 현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근대성과 근대성 이후 사이에서 방황 혹은 유동하는 것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흔들림이야말로 일직선적인 시간성을 해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데 내러티브의 단일한 선율을 다성적으로 변환하게 한다. 이러한 다원적 혹은 다극적인 사유는 서유럽과 북미 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들만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미 전 지구적이며 동시에 지역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근대성의 실천과 실제가 글로벌/로컬하게 진행되는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15회 카셀 도큐멘타는 시사적이다.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은 서양미학의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인 물음을 지역적으로 답변한다는 방법론은 현대미술과 미술비평의 관계에서 유효할 수 있을까? 문제 제기로서 미술이 수행해온 역할을 현대미술이 새로운 답변 모색으로서 기능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유럽의 발명품으로서 ‘미술’은 근대성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 시각예술로서 미술은 여전히 현대미술과 접속하지만 기존의 루트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상황에 빠져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여기가 미술비평이 현재의 처지를 낙관할 수 없는 지점이다. 전문적인 전시기획과 함께 이 전환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1. 무의식 속 자료들

 

현대미술은 전시가 필수적인가? 스펙터클로서 작동하는 미술관 미술은 작품/작업을 전시/기획과 분리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연예(entertainment) 미술’같은 것에 대한 잡담은 있을 수 있지만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이 들어설 여지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구어체의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을 대안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또한 이 난국에 대한 타개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기에는 그 정도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구두로 발표될 때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는 방식으로 글을 쓸 수는 있다. 그것이 일련의 논쟁이 되도록 정성을 들여 조직화하고 있는 지 의문이기 때문에, 이제는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이 미술작품과 맺어온 관계, 미술가/작품의 저항을 해석하고 노정시키기 위한 기술을 포기하려는 모습이 명백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 드러나지 않는 억압된 자료를 과거 어느 시점과 관계되는가를 밝히려는 미술비평의 방식은 작가/작품으로부터 더 이상의 협조를 받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는 일이 더 이상은 결코 가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대신 우리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자료를 현재의 체험 형태로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없게”(프로이트) 되는 것이다. 이것을 치유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상황이나 감정을 되풀이해서 다시 체험하게 되며, 나아가서 불유쾌한 것을 되풀이하려는 그와 같은 충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혹은 엉망진창의 미술비평에게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 밝혀졌듯이 미술비평은 과학인척 하지 말고 일종의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지 과학 등의 미학/예술론을 무시하거나 등한히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 실험의 분석 방법보다는 글쓰기를 중시하는 미술비평의 임무는 문화적 타자의 사유체계와 삶의 방식을 자신이 속한 문화체제 내에서 이해 가능하도록 번역해내는 것을 강조한다는 뜻이다.

아시아에서 현대미술을 논할 때 국가 단위의 측면은 경제적인 경우와 입장들에서 진행되는 듯하다. 문화와 역사의 공동체라는 상황은 크게 고려되지 않고 각각이 유로-아메리칸 전통과의 관계 설정을 서로 경주하는 것이다. 유럽이 공동체로서 인식을 모으는데 철학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음을 안다면 아시아에서 그 필요성과 모색에 대한 경로 또한 기존의 양태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지역성으로서 현대성을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일까를 물을 수 있다. 각각으로서 아시아의 현대미술은 지속적으로 글로벌 프로젝트로서 작동하려는 욕망을 멈추려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 현대미술은 자신의 글로벌/로컬에 대한 성찰을 사용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새로운 아이템으로서 여기려할 뿐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미술비평이 개입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용 설명서가 되어주는 것! 물질의 상상력을 거뜬히 감당하는 이유는 아이템 획득의 기쁨만이 아니라 쓰임새가 나름 이유 있을 때인 것이다. 무용(無用)의 용(用)으로서 순수 예술에 대한 옹호는 이제 구차하다. 감상과 관조에 대한 이론보다는 비판이 필요한데 오히려 매력을 잃고 있다. 예술 이후로서 미술에 닥친 현대미술은 조형 혹은 시각에 대한 관점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다시 이미지와 텍스트의 담론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도상과 사상이라는 인류학적 고찰과도 거리가 멀다. 미술사의 종말 이후의 미술비평에 대하여 분분한 논란에 대하여 말해지듯이 가상의 지역성보다는, 즉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 실제적인 은유가 필요하다. 아시아 현대미술에서 절실한 것은 오히려 보들레르가 ‘근대적 삶의 화가’들에게서 찾고 보여주었던 다층위적인 ‘이상한 미술비평’일지도 모르겠다.

 

 

  1. 비평의 비평

 

“원래 근대, 즉 ‘모던’이라는 단어는 ‘새로운’이라는 의미로 진보적인 미술을 지칭하는 것이고, 현대, 즉 ‘컨템퍼러리’는 ‘동시대의’라는 의미로 시간 개념을 더 많이 나타내는 단어”라고 1998년 『20세기의 한국미술』에서 김영나는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서 ‘현재’의 상황과 관련지어 설명을 이어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서양에서도 ‘모던’, 즉 진보와 근대성에 대한 매혹이 상실되면서 최근에 설립되는 미술관들은 ‘컨템퍼러리’라는 이름을 더 선호”하고 또 “우리나라에서 근대와 현대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언어의 상징계는 무의식의 욕망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 혹은 실천과 은유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아주 유효한 전략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글쓰기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단어를 우리들의 유일한 도구로 보고 선형적 텍스트를 써 나갈 때 부딪히게 되는 몇몇 문제들은 인류학과 그 재현들을 구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각적이며, 선형적일 뿐 아니라 다선형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해결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사라 핑크는 이렇게 지적하며 문화 현상의 복잡성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표현하는 전략을 다변화할 것을 요청했다. 문화기술지(ethnography)는 문화에 대한 재현부터 비교와 비평에 이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이며 이론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이는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현대미술에 관한 글, 즉 미술비평들은 가뜩이나 얇은 독자층 가운데서도 매우 적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뿐이다. 미술비평을 옹호하거나 미술비평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목표가 아닌 이 글은 미술비평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평에 대한 비평에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 아마 대개 비평에 대한 비평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리라고 여겨지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이라는 논점은 ‘아시아’의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달리 말하면 그 연관성 혹은 맥락에 대한 자문이야말로 현대미술에 대한 비평의 의미를 새롭게 각성시킬 것이다. 테리 스미스는 『컨템퍼러리 아트란 무엇인가』에서 “컨템퍼러리 아트란 이를 통해서 오늘의 미술이 스스로와 전 세계의 관심 있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제도화된 네트워크”라고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자기 비평적인 현대미술의 특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서로 맞물려 있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금세기 들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현대미술과 미술비평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현대미술과 미술비평이 담고 있는 사상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의 책무이자 목적이다. 이러한 성찰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상호 비교를 통한 각 입장들의 타당성과 호소력의 정도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선택을 감행해야하는데 그래서 우연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원리로서 작동하지 못하는 현대미술과 그 관계에 대한 읽기와 쓰기라는 미술비평은 마치 온전히 역사성에서 비껴서 있는 것 같다. 미술사의 역사성에서 현대미술의 현대성에 대한 사유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백지에 대한 공포로서 글쓰기가 불분명한 주제적 사유로 바뀌는 것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로서 현대미술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시아의 지역성을 포함하여 ‘장소 없는 공간’으로서 현대성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스스로를 가장 진실하게 드러내는”(하이데거) 부드러운 대응방식일 것이다.

 

 

  1. 컨템퍼러니티(contemporaneity)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읽히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시대성과 영원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지금 읽히지 않는 것이 영원히 잠드는 것은 아니다. 수면의 글은 다시 깨어나면 말을 한다. 읽혀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그렇다면 할 말 많은 시대에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역설적이게도 영원성에 기대고 있다는 의미일까? 미술비평의 글쓰기 방법과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상대인 ‘미술현상’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면 그에 따르는 표현의 전략은 다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 전시기획이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전시기획은 텍스트 중심의 미술비평을 넘어서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선형적 방식이 채택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선형적 내러티브를 따르는 텍스트 기반의 해설이 강력히 요구된다. 여기서 전시기획으로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은 다시 또 흔들린다. 그래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 흔들린 손처럼 참여관찰자로서 미술비평의 다중 위치가 기법으로 도입되기도 한다. ‘미술 제작’의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예술적/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 미술비평은 문화적 맥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와 바로 연결된다. 읽기와 쓰기가 다층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생산의 기획과 감상의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과 다양한 층위야말로 미술비평이 개입할 공간이다. 현대미술에서 작품은 자신을 통해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매개하는 수단으로서 역할을 넘어서 자기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문화비평의 기능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현대미술의 사회 참여적 성격은 냉소적이며 풍자적인 감수성에 근거해 권력에 저항한다. 핼 포스터는 그래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작가들을 ‘거의 인류학자인 예술가’라 부른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더 이상 순수 미학적 영역에서만 독점적으로 논의될 수 없다. 현대미술의 사태는 ‘컨템퍼러니티’에 의해서  1.사회/문화적 국면, 2.상업적 측면, 그리고 3.미학적 영역이 동시에 촉발되기 때문이다.

 

 

  1. 다시 쓰기의 불확실

 

“현재의 재현에서 추출하는 즐거움은 현재를 감싸고 있는 그 아름다움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본질적인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샤를 보들레르는 「아름다움, 유행, 그리고 행복」에서 갈파하고 있다. 그의 모더니티는 단순히 동시대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재현하는 새로운 방식과 연관된다. 그런데 우리의 컨템퍼러리니티는 이미 “모든 것은 불가능한 교환에서 출발한다. 세계의 불확실성은 세계가 어디에서도 자신의 등가물을 갖지 못하고 그 어떤 것과도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의 불확실성은 사유가 진리나 실재와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사유인가? 아니면 사유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세계인가? 이는 불확실성의 일부를 이룬다.”(보드리야르) 이른바 불확실성으로서 미술비평이 작동하는 것이다. 오히려 불특정한 미술비평이 더 개연성을 함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술비평은 전 지구적 경제 협력관계 속에서 아시아에 대한 세계의 권력 균형을 더 평등한 형태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구현하는 패러다임 내지 사고방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일종의 종말론적 비전을 의미하는데 과연 미술비평이 부분과 전체에 대한 관계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의식에 대하여 관용과 기술을 구사해야 한다. 그러나 미학과 미술사(학)의 종말론이 미메시스를 무력화하고서야 다양한 문화적 해석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 문화적 경계에서 동아시아 한국 현대미술의 미술비평은 글을 쓴다. 상징적이면서도 욕망하는 이항 대립적 재현은 불가능한 해결에 대한 경계를 새롭게 그으면서 동시에 흐리게 한다. 이러한 혼종성의 문화는 동일성과 산종성(散種性)이 삼투하는 번역 불가능하지만 의사소통 가능한 낯설고 기이한 이접적인 시간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것(창작)이 아니라 다시 쓰기(반성)가 필요한 것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현대미술의 영역을 항상 염두에 두고 거기에 대응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요청되는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