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너머의 현대미술
김병수(미술평론가)
- 예술 이후 현대미술
우리는 “예술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작품 vs. 텍스트의 시대를 거쳐 물질 vs. 사건이라는 시간 속으로 날려졌다. 그래서 “텍스트의 무대에는 각광들이 없다: 텍스트 뒤에는 능동적인 사람(작가)도 없고, 청중 속에는 수동적인 사람(독자)도 없다: 주체도 객체도 없다. 텍스트란 문법적인 입장을 제거한다: 그것은 한 과감한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비분화된 눈이다: ‘내가 신을 본 그 눈은 신이 나를 본 그 눈과 똑같다.’”(롤랑 바르트) 시각의 상호성은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에로 이어진다. 아틀리에에서 스튜디오로 계승된 작업실로서 방은 이제 실험실/연구실(laboratory)이 되었던 것이다. 컨템퍼러리 아트로서 연금술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 철학을 대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리불가능해 보이던 철학은 지속적으로 분화해 극소화의 세계로 진입했고 현실과는 관계를 희미하게 유지해왔다. 생산도 반영도 아닌 분과는 그 성격을 현대미술과 맺으면서 새로운 경계를 이룩했다.
- 감각의 모순
예술철학으로서 미학은 그 분과를 보편과 특수 속에서 구상했다. 이러한 일반론은 계속해서 개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처럼 연구될 뿐이다. 반면에 감각학으로서 미학은 시각예술 너머의 현대미술과 동력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힘에 대한 공감은 권력을 분점 한다는 의미이다. 철학과 신학 그리고 과학에 의해 지시되어졌던 예술로서 시각에 대한 관점은 희미해진다. 동시에 획득되어지는 관심의 영역은 철학의 펀더멘털에로 복귀이다. 여기서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인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혜나 사랑이 아닌 “거리”일 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은 떨어져서 이루어진다. 특히 지혜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이 처한 운명이다. 오감이 작동하는 에로티시즘은 현실적으로 시각의 우위에서 전체주의의 독재적 감각에로 권력을 이양했다. 시청각을 비롯한 공감각은 지속적인 결합으로 비순수를 지향한다. 순수미술의 대표이던 회화와 조각이 현대미술에서 밀리는 이유이다. 헤게모니의 상실은 미술시장의 활황과 함께 언급되기도 했다. 또 비엔날레의 스펙터클도 극대화의 세계를 이끌었다. 그래서 결국은 “현대사회의 실천적 힘이 그 자신을 떼어내어 스펙터클 속에다 일종의 독립된 제국을 세웠다는 사실은 이 실천적 힘이 줄곧 응집력을 결여하고 있었고 자신과 모순된 채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기 드보르)
- “시각 미술”
감각의 통합과 독재는 시각예술의 자율성을 통제한다. 여기에서 발휘되는 회화의 정치학은 그 생존을 위하여 투쟁해야 했다. 형상과 표현은 여전히 긴박하게 사활을 건 전쟁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 지점이 대략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렸던 시기이다. 글로벌/로컬의 감각은 풍토성을 갖는다. 유동적이면서도 토착적이라는 문화인류학이 작동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색감과 서유럽적 물질감이 세련되고 유려하게 스며든 감각이 펼쳐졌었으며, 정치적 감각에 따른 망각된 토착문화의 현실을 감당하려는 시도도 감행되었다. 정신성을 비물질화와 상응시키고 고발을 이념으로 포장하던 시대였다. 공포에 대한 감각이 인간 본연의 시대성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미술사학에서는 모두 다르게 위치를 잡는데 기어코 감각적인 수준에서는 현실주의와 표현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로 귀결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것이 예술인가를 물으면서 그 정의를 찾는다. 미술이 시각예술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세계를 상정했던 마지막 시기였다.
- 재현>우의>토큰
시각예술에 미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감각과 매체라는 국면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 유효하게 여겨졌던 관념이었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단호하게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연관을 지어 생각해보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거쳐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여러 가지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 아이 클라우드를 비롯한 디지털 저장기술이나 정보기술들과 최근의 블록 체인 기반 대체 불가능 토큰(NFT)은 이미 우리 시대에 대한 기호들인 것이다. 이를 통한 역동성이나 가속화와 같은 요소들이 우리 시대의 의사소통형식이나 교통형식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묘사의 개념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현실이다. 물질-시간의 예술에서 인공적인/전자적인 빛-시간의 예술에로 복귀하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 또는 인류를 철학적으로 화상 동굴 또는 그림자 동굴이라는 인식의 암흑에 계속 고통스럽게 버려두느냐 또는 그로부터 해방시키느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플라톤의 비유에서 현재화할 수 있는 요점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실재성에 대하여 서로 다른 중력이 교차하는 어떤 중요한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상(像)의 의미나 현실에서의 상의 지위 그리고 상과의 관계를 읽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랄프 슈넬)
- 협업
시각예술은 조형예술로 건축, 조각, 회화를 포함한다. 청각예술로서 시와 음악은 서술적이다. 그런데 시청각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총체예술이 그것인가? 미술관과 그 장식 그리고 내부 벽면이 건축-조각-회화로 이어지는 관계일까? 현대건축이 기본적으로 공간에서의 조형적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면 조각은 가장 가까운 인접 예술이라는 뜻이다. 20세기의 조각은 게슈탈트로서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조각 작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 스스로 맞부딪히고 있었다. 이념이나 사실을 모방하던 그 이전의 조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단순하고 근원적인 형태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건축과 미술이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기에는 이미지-메이킹과 공간-형성이라는 협업과 경쟁 속에서 예술-건축의 관계를 구축해왔다. 건축에 기생하는 “미술장식품”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 감각의 등급
도시에 세워지는 이미지-빌딩은 음악, 패션, 미술 등이 이른바 팝(Pop)과 맺는 관계를 유지하는가? 오히려 그들은 그저 어떤 이미지의 소비를 위한 행위자들일 뿐인가? 아르케에 대한 지향으로서 주체 의식을 함축하는 예술가와 그 외화로서 객체화된 예술-작품이 이룩한 굵은 예술은 종말을 고했다. 유명론의 차원에서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중이다. 변증법적 이성으로 이루어 온 세계에서 문화인류학적 인식론은 보편주의 못지않게 상대주의를 통한 다원주의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감각의 하이어라키는 문화에 따라 가변적이다. 귀 기울이면 다른 순서에 따라 존재하는 경계를 눈치 챌 수 있다. 이미 이상과 이념 그리고 과학에 의해 그어진 선들의 지도에 따랐던 시각예술은 문화적 에토스에 의해 그 시각성을 회의해야 하는 숙명을 맞았다. 이것이 시각예술로서 미술이 지역적 한계와 식민성을 유지한 방식이라면 이제는 스스로 거기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파(內破)이면서 확장성을 지닌 “현대성(contemporaneity)”(테리 스미스)의 감각이다. “새로운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니콜라 부리요) 모더니즘은 회화성을 요구했다. 평면성에 대한 억압이 매재와 매체 그리고 행위를 일치시키려는 억지를 부리게 된다. 물감에 적신 실로 캔버스를 짜면 수공예적일까. 혹은 캔버스를 몸으로 맞부딪혀 통과할 수도 있다.
- 협약
회화나 조각의 선험적 조건은 상징적인 가용성에 의해 규정된다. 미술관의 폐관 시간, 지리적인 거리 등과 같은 물리적인 불가항력의 경우를 제외하고 시각예술 작품은 항상 가시적인 대상이다. 이론상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관객의 호기심에 제공되고 그들의 시선에 지배당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현대미술은 정해진 시간에만 보도록 되어있는 비가용성의 특징을 띠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행위예술이다. 행위예술은 한번 실행되고 나면 자료로만 남게 되는데 이 경우는 시간예술인 시나 음악의 시집 혹은 악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유형의 예술적 실천들은 관객과 계약 관계이다. 서로 일종의 ‘협약’을 전제하고 있다. 그 계약 조항들은 감각의 혼종성으로 인해 1960년대 이후 다양화되는 경향을 갖는다. 그 이후 현대미술로서 행위예술 작품은 일반적인 대중/관객을 위해 개방되거나 무엇 혹은 누군가를 기리는 ‘기념비적’인 시간성의 프레임에서 소비되도록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서 예술가가 지정한 청중을 위해서만 전개된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창출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행위예술 작품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운용하면서 조우(遭遇)를 야기하고, 만남의 약속을 제안한다. 즉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의 운명을 탈-은폐 시키는 것이다.
- 감각의 고양과 상실
기념이 아닌 기약(期約)은 감각의 혼종성을 도상의 다양성으로 치환하려 한다. 행위예술에서 총체예술에로 퍼지는 야욕은 혼합/혼융/융합/복합을 돌연히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동시에 급작스럽게 정치적이 된다. 예술의 수도는 망명지이기도 하다. 인상주의는 카메라와의 연관 속에서 자주 언급된다. 권력 투쟁에서 패퇴한 자들의 자구책으로서 새로운 시각 체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로서 사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표현주의의 문제는 어느 한 지역의 에토스가 아니었다. 그 매개된 감각은 이미 이념적인 것이다. “모든 상상적 경험은 의식의 작용에 의해 상상의 수준으로 고양된 감각적 경험이다.”(콜링우드) 반면에 이러한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도달한 현실 속에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의식의 식민지로 취급되던 무의식에로 눈을 돌린다.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반응이야말로 나름의 행복을 보장하는 참된 감각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사건 그 자체에로!”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그때그때 다른 상황 윤리만이 우리의 감각을 조건 지을 뿐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시작된 이 과도기는 우리가 조금 전 인간들 사이의 대화의 종말, 특히 망각이라는 주제를 통해 언급한 1950년대에 정점에 이른다. 그것은 곧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상실, 그리고 게르니카에서 코벤트리 · 드레스덴 · 나가사키를 거쳐 히로시마로 이어진 파괴적 공중 기습으로 초토화된 인간 환경에 대한 감정이입의 상실을 의미하는데, 이 공습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 즉 거의 이천 년 동안 서구 문화 전체를 지탱했던 실제로 보고 얻어진 지각을 일대 혼란에 빠뜨려 버렸다.”(폴 비릴리오)
- 스펙터클의 테크놀로지
스펙터클의 제국은 일종의 공장이다. 그리고 공장의 신체는 기계제이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기계가 부녀노동과 아동노동을 새롭게 확보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자본의 착취재료를 어떻게 증가시켰으며, 또 기계가 노동일의 무제한적인 연장을 통해 어떻게 노동자들의 전체 생활시간을 몰수해버렸는지, 그리고 엄청나게 증가해가는 생산물을 점점 더 짧은 시간에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계의 진보가 어떻게 해서 매순간 더 많은 노동력을 움직이고 더 높은 강도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체계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테크의 시대에 기계미학은 이제 자율성을 띠는데 더 이상 상품을 소유하지 않는 보편적 인간의 법칙이 지향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차원에서 테크놀로지를 형성한다고 하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하이테크가 테크놀로지가 인지되어온 방식에 대하여 현격한 변화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제 하이테크가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모던하고 도구적인 개념으로 단순하게 정의되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테크놀로지가 갑자기 전적으로 비도구적으로 변했다는 하이테크의 신장개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특수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 논의할 때 하이테크는 특수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 여전히 기능한다. 하이테크가 심각하게 고려되는 경우는 테크놀로지의 개념이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현격하게 이동을 함으로써 뚜렷한 변화를 보일 때이다. 이러한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하이테크는 어떤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여겨지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복잡하고, 거의 통제 불가능한 어떤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 목적이 인문주의적 합리성 혹은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이테크 자신의 논리에 따르는 기능과 그 자신의 미학적 구술(口述)이라는 권리 속에서 그 과정을 진행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의 급속한 현실화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좀더 심도있게 다루어야 한다.
- 인류학적 유신론
그래서 폴 비릴리오는 말한다. “이전에 많은 화가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인들과 함께 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딕 성당의 거대한 장미창은 이미 나에게는 하늘이 아니라 내세의 빛으로 열린 창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원격객관(遠隔客觀)적 천계설(天啓設)은 전자기적 초가상성(超假象性) 속에서 오직 현세(現世)에만 이를 뿐이다.” 구글(Google)의 이미지-예술을 떠올려 보라! 그 빛-예술은 끊임없는 변용의 세계로서 물질-예술을 대체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의 변용으로서 예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소멸의 미학자는 이어서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오늘날 신학자의 논쟁 대상이 ‘인간의 의식 속에 신이 태어나게끔 한 문제마저 제거하려는 무신론’이라면, 동시대 예술비평의 대상은 현대 예술의 근원, 그 자유로운 표현-과거의 구상적(具象的) 표현이 아닌 그래픽적 회화적 표현-의 근원마저 제거하려는 ‘인류학적 유신론’이다.(수많은 미술 갤러리의 성상파괴주의적 금지는 여기서 발원한다.)”
- 도상지혜학
최초의 꿈
바람이 유령처럼 집 주위를 배회하는 밤
나는 잠의 문가에 기대어
꿈을 처음 꾼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다음날 아침 그는 얼마나 차분해 보였을까
다른 이들은 불 주위에 서서
짐승의 껍질을 두른 채
서로 모음만으로 얘기하는데,
자음의 발명이 있기 오래 전이었기에
그는 홀로 자리를 떠서는
바위에 앉아 호수의 안개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에게 말하려는 듯이,
어떻게 어디를 가지 않고 갔을까
어떻게 자신의 두 손을 짐승의 목에 둘렀을까
다른 이들이 그럴 수 있을 때는
돌로 죽인 이후뿐인데,
어떻게 자신은 그 짐승의 숨결을 맨 목으로 느꼈을까
또 한편으로는, 최초의 꿈은 찾아갈 수도 있다
한 여인에게, 비록 그녀가 행동하기를
내 생각에,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물가로 홀로 떠나갔다
그녀의 젊은 양 어깨 곡선 이외에
그리고 그녀의 눈을 내리뜬 머리의 차양은
그녀의 외관을 지독히 외롭게 했다,
그리고 누군가 이것을 보았더라면
그 사람도 최초의 인물처럼 내려갔으리라
타인의 슬픔과 사랑에 빠지기 위하여.
빌리 콜린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무엇일까? 그저 꿈, 아니면 사랑과 외로움에는 슬픔이 따른다, 아니면 슬픔이야 말로 사랑을 이끄는 힘이라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분석한 꿈의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결핍과는 차이가 생기는 신화적 철학이다. 변증법적 이성과 무의식의 정신분석은 도상해석학 너머의 “도상지혜학(icono-sophia)”으로 애정의 전선을 옮긴다. 예술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정중하게 말한다. “그 옛날 인간 세계에 있었던 ‘사랑의 공간’이 사라진 뒤의 이 세계에서, 갈 곳 잃은 사랑의 능력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지성들, 그 지성들은 자신들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지도 않고 중심적인 존재도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픈 자신의 존재가 거대한 의식체와 같은 것에 감싸이고 관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존재, 생명, 지성을 일으킨 것이 아득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거대한 의식체의 ‘사랑’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과 SFX는 이러한 현대 정신의 모습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코노소피아는 아직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건축-조각-회화로 이어지는 시각예술을 컴퓨터로 그려내면 미술관의 한 풍경이다. 시공간에 내재하는 원경을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제시하는 이미지-도상은 무언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빛깔로 먼 곳의 눈길에 드러나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인간 존재와 세계의 의미를 탐구해온 도상해석학의 역사에서 하이테크의 그래픽-예술은 새로운 표현 양식의 징표라 할 수 있다.
- 예술 제도 안팎
자부심과 열등감의 정치학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이동한 결과이다. 새로운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 있는 원격객관적 천계설의 21세기이다. 현대미술이 채택한 마음의 정치학은 쉽게 말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랑보다는 사건으로서 연애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이다. 분석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날루시스(analusis)’에서 유래하는데, 이 말은 ‘풀어헤침’이나 ‘해체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형이상학적 입장은 미술의 역사를 탈구축한다.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이 자연의 이미지를 원할 경우, 그녀는 그런 이미지를 직접 제작하지 않고 다른 이미지를 그에 적합하게 각색한다. 그녀가 그러한 작업을 하는 목적은 자연에다 특정한, 문화적으로 결정지어진 지위를 부여하는 문화적 가치체계에 자연이 언제나 이미 관련되어 있는 정도를 밝혀내는데 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뒤샹의 기성품 전략도 굴절시켜 대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해체의 도구로 이용한다.”(크레이그 오웬즈) 이것은 역행적 분석이다. 일차적으로 명제에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달리 정의(定義)를 추구한 데서 유래하는 분석은 ‘분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분해적 혹은 ‘전진적’ 분석이다. 우리가 오늘날 개념이라 부르는 것에 적용된다. “포스트모던 패러디를 통해 ‘상호텍스트성’이 의미생산에 있어 불가피한 요소라는 것이 입증됨으로써 예술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은 더더욱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 대중매체와 같은 다른 재현적 실천들이나 제도들의 복합체 밖에 존재한다고 쉽게 가정할 수 없게 되었다.”(빅터 버긴) 이것은 시각예술이라는 관념주의에 대한 현대미술의 반란이다. 기어코 언어적 전회(轉回)는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푸념을 낳았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논리는 구성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때그때의 개념을 분석해야할까? ‘이상언어’의 시각예술 vs. ‘일상언어’의 현대미술. 이 경우 실증사관은 종말을 고했다. 형이상학이 복권된 것이다. 이 새로운 존재론은 감각학이다. 언어와 정신이 감각의 대상으로서 다뤄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정학적 미학에 의한 에토스의 에이전트들은 현대미술을 글로벌하게 한다. 파리-뉴욕-런던-베를린-베이징이라는 현대미술의 에이전트들은 서울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오늘날 지리-정치학적 현대미술의 분석은 우리의 감각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특정 현대미술의 작가에 대하여 모르고도 우리는 현대미술에 대하여 떠벌릴 수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이 곧 그것을 파악하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애호와 착오 사이 현대미술
그렇다면 시각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술사는 현대미술을 포함하는 미술이라는 나머지 분야에 대한 지배 군주인가? “역사는 언제나 진짜 지식의 분과들이 요구하는 노력, 즉 지성을 혹사시켜 열중하게 하는 노력을 경험하지 않고 무언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구였다.”(쇼펜하우어) 시대착오증과 골동품 애호증이 의지하는 감각은 후자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가끔 이상적인 결과로서 “지평들의 융합”이라는 상호 대화의 국면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시각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은 미술사는 시각성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해지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사건”에 대하여 미술사가 시각성에 도달하는 잴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을 때가 바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각예술 너머의 현대미술은 진보적이고 해방적인가? 현대미술이 자유적·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는 일에 독점권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독제인가? 이데올로기 대결이라는 문화전쟁에서 현대미술은 자유롭지 못하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맞붙고 있다. 이러한 근대성 이후의 신학-미학적 논쟁과 함께 과학 전쟁이 한편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각에 대한 실재주의 vs.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사회구성주의와의 경쟁이다. 어쨌든 현대미술은 무엇이 그리 잘못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혹평과 현재 일상생활의 재미없는 특징들에 관한 통탄 등으로 불평이 점증하고 있다. 희생양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럼, 현대미술은 시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