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와 모더니즘 미술

최형순(미술평론가)

 

1. 들어가며

서양 모더니즘은 가장 번성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벨 에포크(la Belle Epoque)는 세계적인 비극에 앞서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되는 시기다. 미술은 인상파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큐비즘이 이 시기에 놓인다.

2014년 한국에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이 시기의 미술을 살펴볼 수 있다. 인상주의가 진정한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할 때, 그 전조가 되는 모더니즘 태동기의 작가들을 포함해 인상주의 대표작가들 작품으로 이런 전개를 살펴보려 한다. 여기에 나온 작품들은 베네수엘라 국립미술관, 독일 브뢰한미술관, 막스 리버만 빌라, 막스 리버만 재단 및 협회로부터 나온 작품들이다.

  1. 모더니즘 이전, 유럽미술의 전통
오라스 드 카이아스, 목욕하는 여인, 200×119.5cm, 1874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처럼, 르네상스 이래 미술은 보이는 대로 그리기의 완성을 이룬 듯했다. 바로크의 화려함과 변칙도 그 완성도를 조금 일그러뜨린 것이었고, 로코코의 정교한 장식성의 확장도 본질로서 르네상스의 위대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하나의 고정된 시점으로 화면 전체를 완성해야 하는 원근법, 그것은 서양 회화의 법이었고 완전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전주의를 중심으로 유럽미술은 여러 장르를 풀어냈다. 성화와 역사화, 역사인물을 비롯한 누드와 초상을 다룬 인물화, 세시풍속과 일상의 삶을 담은 풍속화, 자연을 노래한 풍경화, 고정된 사물, 즉 인생의 무상을 상징했던 정물화가 서양 전통 속에서 향유되었다. 오라스 드 카이아스(Horace de Callias, 1847-1921)의 <목욕하는 여인>은 120호 크기의 누드로 여체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인물 중에서도 고전적인 비너스를 담고 있는 예다.

반면 서양 전통에서 풍경화와 정물화는 비교적 위계가 낮은 장르였다. 인상파의 풍경화와 입체파의 정물화는 이런 위계를 허물었다. 원근법도 효력을 잃었다. 곡면의 기하학, 가령 리만 기하학이 있어야 이해되는 둥근 지구에 대해, 원근법은 모든 사실을 다 말해줄 수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평면이란 조건과 유클리드 기하학이 원근법의 기초였지만, 그것으로 시각 현상을 설명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쉐브뢸의 색채학은 물체의 고유색(local color)이라는 개념도 깨뜨렸다. 물체의 색은 빛에 반응하는, 즉 단지 빛의 적용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카데미즘은 서서히 혁신적인 미술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2-1. 로코코 화가의 성화

지오반니 도메니코 페레티 다 이몰라,

지오반니 도메니코 페레티 다 이몰라(Giovanni Domenico Ferreti da Imola, 1692-1768). 작가는 1768년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거의 250년 전에 그린 것이다. 18세기는 로코코 시대로 알려져 있다. 16세기부터 세기별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로 이어지는 미술의 오래된 역사를 떠올려야 하는 그림이다. 1300년대부터 시작되는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에 피크에 이른다. 최고봉은 언제나 작은 부분이듯 1500년대 초 20년의 짧은 기간을 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라고 부른다. 해부학뿐만 아닌 자연과학까지 모든 학문을 알아야 하는데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인 원근법과 단축법, 명암법을 구사하는 회화야말로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천재 레오나르도는 주장했다. 그 유산이 바로크로, 로코코로 변주를 이어갔다.

바로크는 르네상스의 완전함을 ‘일그러뜨린 진주’로 해석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종교적 열정이나 절대왕정의 웅장함이 소왕국의 궁정이나 귀족의 저택으로 스며든 작은 바로크 같은 것이었다. 로코코 시대에도 천정화에서 주로 보이는 화려한 빛과 구름 속에서 하늘에 떠있는 사람들과 같은 그림이 종교화의 흔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여러 천정화를 남기기도 했다. 캔버스에 그린 이 그림 <모세와 구리뱀>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세와 구리뱀>은 민수기에 나온다. 애급을 나온 유대인들은 광야를 방황하며 때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다. 한 달이면 가나안까지 갈 길을 40년이 걸린 것도 징벌의 하나였다. 가나안 정탐 결과 또 다시 돌아서 간다고 원망하는 사람들, 그들은 불 뱀에 의해 벌을 받게 된다.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명하였다. “구리뱀(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장대는 십자가에 매달릴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구리뱀을 가리키는 모세의 머리에는 뿔처럼 빛이 솟아오른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는 말씀 이래 그의 그림과 조각에 흔히 묘사되는 형상이다. 모세 앞에서 불 뱀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깊게 꼬인 포즈가 엉켜있다. 여인은 손으로 달려드는 뱀을 뜯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제일 앞에 내쳐지듯 어린 아이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지옥과 같은 광경은 그리는 중에 약간 절제되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엎어진 사람 위로는 뒤로 누워 고통으로 절규하는 사람을 그리다 말았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모세와 함께 있는 사람의 옷 아랫부분으로 처리되었는데 250년의 세월이 그것을 표면으로 흐릿하게 꺼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작품을 직접 보는 묘미가 아닐 수 없다.

2-2. 아름다운 시절의 ‘귀부인’

에두아르도 레온 가리도, <귀부인>, 32.8×25.4cm, 1900

모더니즘 전시의 시대배경에는 벨 에포크가 놓여있다. ‘벨 에포크’란 양차대전과 격동의 20세기에 회고해 본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으로 파리가 번성했던 때를 말한다. 미술로 보자면 19세기 말은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가 펼쳐졌던 시기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마티스의 야수파, 그리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가 활동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브라크가 입대하게 되면서 정통 입체파 활동도 중단된다. 1874년의 인상주의부터 1914년 세계대전 이전의 입체주의, 즉 벨 에포크를 수놓고 있는 미술이 모더니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번성과 화려함은 한 세기 전 18세기말 프랑스 혁명 이전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귀족적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귀족풍과 화려함은 프랑스혁명,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등장과 정복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과 극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앙시앙 레짐의 호사스러운 화려함을 그대로 로코코 미술이 대변해 주지 않았던가.

그와 같이 벨 에포크 또한 격랑의 시대에 앞선 황금시대였다. 에펠탑과 그랑팔레, 프티팔레의 예술적 분위기에 센 강 위의 화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그 시대를 기념한다. 거리를 거닐던 우아한 복장의 남녀와 그들이 어우러졌던 물랭 루주, 그곳을 오늘날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인상파 작가들이 누볐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유행과 분위기를 이 <귀부인>처럼 잘 보여주는 작품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홍조가 감도는 세련된 얼굴과 깊은 보조개, 장식 많은 검은 모자의 멋은 얼굴을 한껏 귀티 나게 드러낸다. 가는 허리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 재킷과 가슴의 브로치, 타이와 흰 칼라를 드러낸 옷매무새는 또 어떤가. 장갑을 낀 양손에는 꽃다발과 양산이 들려있다. 뒤쪽을 부풀어보이게 만드는 버슬드레스와 무늬도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대리석 난간이 있는 계단을 내려서는 귀부인의 자태를 보여주기에 손색없는 그림이다.

이 작은 캔버스에 이렇게 정교하고 많은 볼거리를 담아낸 작가의 솜씨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바탕색 위에 투명하게 필선 하나하나가 읽히는 회화적인 붓질도 작가의 필력을 드러내고 있다. 스페인 태생의 에두아르도 레온 가리도(Eduardo León Garrido, 1856-1949)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화려한 귀부인으로 그 시대를 담아내던 작가다.

  1. 미술의 모더니즘

모더니즘 이전에 아카데미즘의 질서에 반항했던 움직임은 19세기 말에 확산되었다. 마네가 스타가 된 1963년의 <낙선전>, 1874년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회 인상파전, 1884년 인상파전에서 선보인 점묘법의 신인상주의, 상징주의의 대두, 앙티미즘과 퐁타방파, 나비파의 등장은 19세기말을 풍성한 미술로 수놓았다.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시 이후 세기말의 작가들을 이제 우리는 넓은 의미로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이라 부르고 있다.

서양의 아카데미즘을 극복하게 했던 가장 결정적인 새로운 미술은 인상주의였다. 인상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네, 그리고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리, 드가, 베르트 모리조는 잘 알려진 인상주의 작가들이다. 신인상주의에는 쇠라, 시냑, 에드몽 크로스가 있다. 후기인상주의는 고흐, 고갱, 세잔으로 대표된다. 로트렉, 독일에서 분리파와 함께 활동한 뭉크,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클림트도 후기인상주의 시대 작가들로 기억하게 된다.

인상주의 대표작가는 클로드 모네다. 그의 작품 <인상-해돋이>에서 인상주의란 말이 나왔다. 여러 시리즈 작품들이 빛의 변화를 담아냈다. 그것은 고유색을 걷어내고 보이는 색을 제대로 표현한 인상파의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전시에 나온 또 다른 인상주의 작가 피사로는 동료들로부터 영감이라 불릴 정도로 연장자였지만, 작품 경향이나 사고는 열려있는 작가였다.

또 다른 독일의 작가로는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이 있다. 그는 독일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지금도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있는 막스 리버만 하우스와 재단, 막스 리버만 협회, 막스 리버만 빌라를 통해 기념되고 있다. 베를린 소재의 브뢰한 미술관(Broehan Museum)은 아르누보, 아르데코, 베를린분리파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그곳의 주요 작가인 하게마이스터(Karl Hagemeister, 1848-1933)는 마네와 교유하기도 한 또 다른 인상파 작가다.

3-1. 인상파 모네

말로만 듣던 그림을 눈으로 확인하는 설렘의 기회. 세계적인 작가들, 미술사의 주요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 명화들. 지면을 통해서 보았던 작품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던 기억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린다.

모네, <워털루 다리>, 66.4×92.7cm, 1902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주의의 처음이자 끝일만큼 중요한 작가다. 그의 작품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나왔고, 인상파 화풍도 그의 그림으로 가장 쉽게 설명된다. 특히 여러 종류의 연작은 빛이 다른 조건에서 같은 소재를 반복해 그린 것으로, 인상주의를 설명할 때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아침과 한낮과 저녁, 흐리고 맑은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그림 속에 담은 <루앙성당> 연작은 총 40여 점에 이른다. 이 작품 <워털루 다리(1902)>도 그런 시리즈 중의 하나다. 모네의 연작은 그 외에도 포플러, 곡식더미, 템스 강, 수련 등 종류도 다양하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죽을 때까지 모네는 인상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 중 원숙기에 놓이는 작품들이 그가 ‘런던들’이라고 불렀던 일련의 작품들과 <수련>이다. 1899년부터 1904년에 걸쳐 세 번 영국을 방문하며 그린 템스 강, 워털루 다리, 체링크로스 다리, 영국 국회의사당은 방대하고 다양하여 모네 연작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국적 색채와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인상파에 영향을 미친 빛이 흐르는 <노예선>을 그린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처럼 그도 워털루 다리에서 빛과 안개로 가득한 대기를 그렸다.

명확한 형태, 빛나는 피부색을 위해 사라져야 했던 작가의 필치, 심원을 바라보듯 고양된 포즈는 더 이상 요청되지 않았다. 모네와 인상파에 이르러 아틀리에 속의 어둡고 검은 색으로 가득한 고전주의 자연은 명을 다했다. 순간적인 인상과 같이 즉흥적이고 붓질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원색들이 대신 그 자연을 채웠다. 인상주의 이후 미술은 이제 고흐의 빛나는 터치와 야수파 마티스의 주체할 수 없는 원색의 향연에 빠져들게 된다.

3-2. 막스 리버만의 독일 인상주의

막스 리버만, <북동향 정원>, 70.2×88.6cm, 1919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은 풍경뿐만 아니라 인상주의적 필치의 초상화로도 유명하다. 특히 인상파적 경향이라면 풍경을 중시해 볼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 <북동향 정원>은 풍경화 중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가 베를린 근처에 반 호수(Wansee)에 빌라를 짓고 호수를 향한 앞과 빌라 뒤에 정원을 꾸민 것은 지금도 베를린의 명소 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호수를 향한 앞은 넓은 잔디밭과 가로수처럼 심은 나무들이 있다. 그 한쪽으로는 ‘울타리 정원’을 가꾸어 미로 같은 길을 낸 정원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동안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에서 이제 거의 원형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리버만이 가꾸며 수없이 스케치하고 그려놓은 작품들 때문에 원형복원이 가능했다. 이런 ‘정원’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이 많아 리버만의 전시와 무게 있는 작품집 중에는 정원(Garden)이 주제인 것도 있을 정도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빌라 뒤쪽의 정원을 담고 있다. 오른 쪽으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2층 규모의 빌라 건물의 아랫부분이다. 작품의 정확한 제목에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왼쪽으로는 정원사 집(Gardener’s House)이 보인다. 지금은 빌라에 관한 안내소, 기념품을 파는 아트숍, 표를 파는 곳이 있는 건물이 되었다. 화단에는 겨울에도 화단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관목들을 가꾸어 놓았다. 나이프와 원색의 붓질로 인상파 풍의 풍경화 양식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1. 벨 에포크 모더니즘의 절정, 큐비즘

인상파가 만든 모더니즘은 20세기 들어 다양한 미술운동들을 만들어냈다. 1905년에는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가 나왔다. 1907년에는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려 입체파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마리네티의 ‘미래파 선언’에 이은 미래파의 활동, 러시아 구성주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프랑스의 순수파 등 수많은 미술운동들이 일어났다. 세기말에서부터 이런 미술운동들이 빠르게 확산되었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에 입체파는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미술운동이 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 외에 페르낭 레제도 입체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원통의 관을 닮은 그림이라하여 ‘튜비즘’이라고 따로 이름이 붙었다. 80호 크기의 대작으로 레제가 가장 많이 다룬 주제였던 <곡예사와 음악가들>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함께 공동작업을 했던 피카소와 브라크가 일군 큐비즘의 이론가로 정통 큐비즘을 이었던 후안 그리스(Juan Gris)의 <그릇과 컵, 숟가락>, 디에고 리베라, 입체파 조각가로 더 알려진 앙리 로랑스의 <왈츠(구성)>은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 종합적 큐비즘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에서 이름을 딴 오르피즘의 작가 로베르 들로네의 아내이자 큐비즘 화가인 소니아 들로네, 입체파의 이론가들이며 앙데팡당 전에서 주로 활동했던 알베르 글레이즈와 장 메칭어, 시적 감성의 좀 더 구성적인 형식을 가졌던 로제 드 라 프레네의 동시대 작품들도 입체파의 중요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4-1.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모자 쓴 여인, 61×49.5cm, 1962

<모나리자>에 무슨 더 할 말이 남아 있을까. 짧은 지면에 다 담지 못할 많은 이야기들은 책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도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모나리자의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도 매년 한 두 개가 아니다. 모두가 아는 고전이란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생성해 낸다. 피카소가 또 그렇지 않던가. 때마다 새로운 작품가격으로 미술시장이 뜨거웠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가 함께 살았던 7명의 연인들 이름조차도 모두 헤아릴 정도다. 호불호가 커서 거침없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에프라임 키숀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청되는 것은 그 이름이 모두에게 가장 공통분모가 큰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미술을 배경으로 하는 한 그를 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상파에서 발원한 모더니즘 이후 입체파는 모더니즘의 절정을 이룬다. 포스트모던을 경계로 모더니즘이 더 갈 곳이 없어진 곳에 미니멀아트가 놓인다. 핵심이 되는 본질을 향한 끊임없는 축소, 미니멀아트라는 ‘최소한의 미술’은 끝을 보여주었다. 실험은 미술 외에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추상으로 향했다. 그 중심에 입체파가 있다.

1960년대 피카소는 입체파적 공간해석에 거친 필선들을 많이 담았다. 고전적인 작품을 보고 패러디 작품들을 한참 펼치고 난 후였다. <모자 쓴 여인>도 입체파 양식을 담고 있다. 입체파의 공간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단순한 하나의 시점이란 원칙을 버렸기 때문이다.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사실 힘이다. 여러 시점은 화면을 풍성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여인 흉상엔 앞과 옆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입과 턱 사이를 따라가면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도 찾을 수 있다. 전시회를 열정적으로 찾는 한 기자는 이 그림에서 남녀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읽어내기도 했다. 색은 면으로 칠해지지 않고 선이 하나하나 살아있다. 강한 검은 선들은 단지 몇 색만 더해 화려한 화면을 만들어 낸다.

논란 많은 피카소에 대한 혹평을 다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라질을 뺀 중남미 국가 모두가 스페인어를 쓴다. 모국 같은 스페인의 영웅 피카소는 그들에게 특별하다. 100년이 넘는 베네수엘라 미술관 문화는 적어도 우리가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7개관에 이르는 국립미술관에는 세계 미술관들을 경험한 평생의 전문가들로 무장된 베테랑 큐레이터를 비롯해 1,000명의 직원들이 포진해 있다. 전속 변호사들이 작품 국제교류의 행정적 절차들을 돕는다. 때마다 공인과정을 거치는 전시에 이미 수차례 나온 작품이다. 국제적인 보험, 저작권 처리 과정에서 작품의 진위를 가리는 과정이 포함된 피카소재단의 허락이 필수다. 이 작품은 베네수엘라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피카소 작품이다. 피카소의 유화 한 점을 지금 여기서 향수하는 것이 특별한 기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4-2. 입체파의 큰 별, 브라크

어둠만이 보게 하는 세계가 있다. 수없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하늘을 흐르는 은하수는 밤이어야만 자태를 드러낼 수 있다. 별에는 색도 많다. 그 형형색색의 별들이 은밀한 색을 보여주는 것도 깊은 어둠에서만 가능하다. 밤 눈빛 속의 산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달빛이 없어도 지붕 위의 눈이며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이 훤하다. 눈 쌓인 밤, 나무들은 흐드러진 벚꽃 터널보다도 더 흰 가지들을 드리우고 있다. 가끔 내미는 달빛 속의 눈 세상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현란한 불빛을 드러내는 도시의 야경 못지않게 어둠이 선사하는 극한의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조르주 브라크, <꽃과 팔레트>, 124×116cm, 1954-55

파리의 가장 누추한 곳 중의 하나 바토 라보아르(Bateau-Lavoir, 세탁선)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만난 곳이다. 파리로 이주한 무명의 작가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세탁선’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처였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브라크를 감전시켰다. 브라크는 곧 피카소와 함께 본격적인 미술실험을 진행한다. 브라크가 그린 1908년의 <에스타크 풍경>을 보고 마티스가 ‘입방체(큐브)’를 쌓아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은 곧 그들 예술 운동의 이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큐비즘(Cubism)이라 부르는 미술은 그렇게 태어났다.

큐비즘은 논쟁적인 모더니즘의 중심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이 충동적인 피카소와는 다른 논리적인 브라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적인 창조성이 넘치는 피카소와 달리 부드러운 고전인 브라크를 『큐비즘』의 저자 존 골딩이 언급하고 있다. 브라크는 큐비즘 성공의 중요한 열쇠였던 셈이다. 큐비즘을 이은 수많은 예술운동의 뿌리로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과 그 뒤를 잇고 있는 브라크를 주목해야할 이유다.

브라크의 이 작품은 80호 크기의 대작이다. 바탕에 두터운 질감처리를 하여 탄탄한 마무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위로 해바라기 같은 꽃이 보이고 아래로 넓은 면으로 쪼개진 팔레트가 보인다. 입방체에서 시작되었지만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 평면화 된 것이 큐비즘 발전의 마지막 단계였다. 이 작품도 그와 같은 성숙한 큐비즘을 보여주기에 손색없는 그림이다. 피카소에 가린 어둠이 있다한들 브라크라는 거성(巨星)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난독증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브라크 작품은 때로 피카소의 작품가(價)를 능가하기도 한다.

4-3. 프리다칼로의 디에고 리베라

중남미 미술을 세계에 알린 첫 번째 작가, 디에고 리베라. 그의 작품으로는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영웅적인 사람들과 멕시코의 역사가 새겨지곤 했던 벽화를 우선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리얼리즘의 힘이 가득한 멕시코 벽화운동을 미술사에 드러내었던 그였다.

디에고 리베라, <오렌지>, 54×65cm, 1917

그의 배우자 프리다 칼로는 또 어떤가. 미간을 가득 메운 짙은 눈썹과 강렬한 눈빛의 자화상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담았다. 그것은 오늘의 여성이 투쟁하고 발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세계인의 심장에 각인되어 있다. ‘프리다’라는 이름에 깃든 ‘평화’라는 뜻과 달리 그 인생은 전쟁터였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디에고와의 사랑과 결혼은 숱한 상처를 남겼다. 영화 ‘프리다’의 광고카피처럼 “그들의 만남은 가장 큰 사고이자 최대의 축복이었다.” 그런 그녀의 우상이던 거장 디에고 리베라였으니 그 마력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만나는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은 큐비즘 작품이다. 이를 통해 20세기 미술에 입체파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 한 번 살필 수 있다. 입체파 이후 미래파, 절대주의, 구성주의, 순수파, 신조형주의 등 수많은 예술운동들은 모두 입체파에 빚지고 있다. 그리고 또 샤갈 같은 서정적인 작가나 모더니즘과 대척점에 설만한 다다(Dada)의 뒤샹, 그리고 이 디에고 리베라 같은 벽화운동 작가에 이르기까지 입체파시기를 거친 거장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작가의 입체파시기 뿐만 아니라 입체파의 미술사적 중요성도 더불어 보여주고 있다.

‘오렌지’라는 작품 제목은 오른쪽 가운데 넓은 그릇에 놓인 오렌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둥근 오렌지 모양의 윤곽선은 실루엣처럼 다른 물체로 연장되어 있다. 그 실루엣은 그림 여기저기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입체파의 ‘평면성’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세잔에서 영감을 얻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처음 입방체를 그린 것은 맞다. 그로부터 입체파란 명칭도 붙었다. 그런데 입방체의 기초단위인 면, 그 평면이 그림의 주제가 되기 시작한다. 결국 색종이를 오려붙인 것 같은 평면으로 구성되는 그림, 그것이 성숙한 입체파 양식이 되기에 이른다. 모더니즘이 회화의 본질로 평면성을 주목할 때 입체파부터 언급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개념화, 추상화, 단순화되는 모더니즘의 행보를 입체파가 축약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탁자에 펼친 보자기 위로 그릇에 놓인 오렌지와 병, 상자 같은 함이 하나의 정물화를 이루고 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1910년대 파리 시절과 그의 입체파 화풍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1. 글을 맺으며

미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오해될 일이 아니다. 데스와(M. Dessoir)의 분류와 같이 ‘미’는 예술이 다루는 ‘추’를 포함한 여러 가지, 즉 숭고, 우미, 풍자나 해학이 있는 골계, 비장과 같은 여러 개념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모두가 어우러져 예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미학 역시 이름으로부터 오는 오해가 있다. 바움가르텐은 이성과는 다른 감성학으로 미학(Aesthetics)을 말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울림이 있는 것, 즉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피노자의 감응(Affect)은 이에 대한 적절한 정의로 보인다.

파리를 감전시킨 다비드의 강력한 신고전주의가 구체제와 극적으로 대비되듯이, 파리의 벨 에포크는 제1차 세계대전과 크게 대비된다. 로코코가 혁명을 초래한 구 귀족의 나른한 타락으로 해석되어 프랑스 혁명과 함께 한 신고전주의와 대비되고 있다면, 벨 에포크는 그저 사치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그렇듯이 파리라는 모더니즘 탄생지와 자본주의는 이 좌파 지식인에게는 비판대상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시대를 대신해 제1차 세계대전이 강력한 어떤 미술로 지지받는 것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봉건사회체계를 무너뜨린 혁명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전례 없이 세계가 전장이 되었던 참혹함과 대비되는 번성했던 시대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더 벨 에포크에 놓여있다. 미술은 이제 본격적인 개인의 자유로운 예술의지를 구가하며 자신의 가치를 한껏 뽐냈다. 그 속에 인상파와 입체파가 놓여있다.